청송백자 이야기
청송백자의 유구한 역사는 옛 문헌 등을 토대로 시작한 청송백자 가마터 지표조사를 통해 백자 파편과 가마터 등을 발견하면서 밝혀졌습니다. 조사결과, 청송 내 백자 가마터를 총 48기 발견하였는데, 대부분 ‘도석’이 산출되는 청송 법수광산을 기점으로 반경 10km 이내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시기적으로 16세기부터 백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청송백자는 『세종실록지리지』와 『경국대전』에 사기공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기록과, 19세기 저술된 『임원경제지』에 청송지역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관요가 아닌 민간에서 쓰이던 생활자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청송백자에 관련된 내용은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더욱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주로 청송의 우수한 토질과 도석에 관련된 기사들이 많은 편입니다. 이에 따르면 청송에서 나는 원료는 매우 특별한 성분을 함유한 까닭으로 형상할 수 없는 광채와 색채를 자아냄은 물론, 기벽을 얇게 제작할 수 있는 이점까지 겸비하여 진헌자기 (進獻磁器, 임금께 예물로 바치는 자기) 제작 시 종종 활용되었다 합니다. 청송에서 굴취되는 원료가 타 지방에 비해 유난히 품질이 뛰어날 뿐 아니라 특이한 성질이 함유되었기에 이를 사용하여 완성시킨 백자는 중국 송대 백자와 유사한 유백색을 띠는 장점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독특한 원료는 중앙시험소에서 인정하고 극찬한 바 있어 청송지역은 일제침략기에도 남부지방으로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원료조사에 착수했고 이에 따라 도자제작도 가장 시급히 이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는 결정적으로 백자 생산 기술력을 높인 시기이기도 하여, 당시 ‘왜사기’라고 하던 일본식 사기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청송백자의 기술력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여러 문헌자료를 통해 청송지역에는 조선중기(16세기)부터 생활자기로서 백자가 생산되었으며, 도석을 주원료로 하고 유백색을 띠는 청송백자 고유의 특징은 18세기부터 등장하여 19세기에 그 기틀이 마련되고, 20세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청송백자를 빚는 주원료는 도석, 유약, 나무, 물 등입니다. 청송백자는 다른 백자처럼 백토를 사용하지 않고 도석(陶石)을 빻아서 빚기에, 옛날부터 질 좋은 도석을 구하는 것은 도자기의 품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질 좋은 도석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법수광산은 청송군 부동면 신점리 법수마을에 위치한 광산으로, 유약의 재료인 회돌과 보래, 도자기를 구을 때 쓰는 나무도 광산의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무포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부천, 주산천, 가천과 각하천 지류 등에서 풍부한 물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법수광산에서 생산되는 도석은 내화력이 뛰어난 특징을 갖고 있어 초벌구이만으로도 백자의 제작이 가능하며, 도자기의 두께를 얇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여 가벼운 장점이 있습니다.
도석은 지하에 암맥의 상태로 존재하였는데, 광부들이 곡괭이로 굴을 파고 정과 망치로 채취하였습니다. 채취한 도석은 광부들이 등짐으로 져 굴 밖으로 옮겼으며, 이후 생산 효율을 더욱 높이기 위해 굴 안에 레일을 깔고 갱차를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채취한 도석을 가지고 사기를 만들어 내는 날을 ‘점날’ 이라고 불렀습니다.
‘점날’에 사기굴에서 꺼내온 그릇은 품질에 따라 ‘원기’, ‘중태’, ‘파기’의 세 등급으로 분류하는 사발따기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점주는 이렇게 분류된 ‘원기’를 종류와 크기별로 마당에 정렬한 뒤 장사꾼을 기다렸습니다.
당시 청송백자는 물량이 부족하여 등짐장수들이 서로 경쟁을 하였습니다. 점날에는 각지에서 온 등짐장수와 지역장사꾼들이 몰려들었기에, 등짐장수들은 점날 이전 사기공방에 와 주막에서 숙식을 하며 점날을 기다렸습니다. 점주는 등짐장수들에게 그릇을 공평하게 분배해 주었는데, 일부 등짐장수들은 제기나 병과 같이 특수한 그릇을 선불로 예약주문하기도 했습니다.
각 지역 상인들과 그릇을 사기위한 주민들로 점날에는 사기공방 뿐 아니라 마을이 온통 축제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점날이 다가오면 주막에서는 미리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맞이에 부산했다고 합니다.
조선후기에는 인구증가와 더불어 대동법의 시행을 통한 시장의 발달로 백자 수요량이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시장의 발달은 청송지역에도 예외일 수는 없어, 백자생산지 인근 교통의 요충지에 5일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시장의 발달은 청송백자의 활발한 생산과 유통을 자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열악한 당시의 도로환경으로 청송백자는 대량 유통되기 어려웠고, 물류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그릇이 더 얇고 가벼워지는 특성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청송백자 유통은 점주에게서 등짐장수와 지역장사꾼이 사기를 받아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유통권역은 생산지를 중심으로 거리가 100km 에 이르는 곳도 있어, 상당히 광범위하게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송백자는 20세기에 이르러 문경백자와 함께 경북지역의 생활식기를 공급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오직 500년의 역사를 이어가는 청송백자의 전승과 보존만을 생각한 고만경옹의 장인정신을 계승하며 생활 속에 빛나는 작품들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청송지역의 천연자원인 도석을 빻아 만드는 독특한 제작방식을 취하고 있어 흙빛을 띄는 도자기들과는 달리 맑은 크림색을 띄는 것이 청송백자만의 특징입니다.
500년간 장인의 손길로 빚어진 청송백자는 절제된 선에서 나오는 모던함과 특유의 빛깔로 전통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시대와 세대가 사랑하는 전통생활자기입니다.
청송백자는 무공해 전통생활자기로,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1250~1300도에서 고온 소성하여 얇고 가볍지만 강도가 높아 현대인들의 식탁에서 더욱 기품있는 생활자기로 거듭나고 있습니다.